“왜 그렇게 살아? 회사도 임원도 네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어. 성업은 창의적인 사람이잖아.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정글에서 살 수 밖에 없어. 정글에 나와서 스스로가 원하는 걸 만들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을 한번 배워봐. 내가 도와줄께.”
성업님의 눈이 슬며시 커졌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 기세를 몰아서…
“혹시 만화나 웹툰 이런거 좋아해?” “아뇨 뭐 딱히. 그런데 그런건 왜 물어보세요?”
의외로 심드렁한 답에 마음 한구석이 덜컥했지만 그래, 맘 먹었으니 끝까지 밀어붙이자, 는 마음으로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니 내가 요즘 투자하려는 회사… 뭐 한명이니까 아직 회사라고 하긴 좀 그렇고. 거기서 정부과제 제안서를 하나 써야하는데 대표님이 혼자 하기 어려워 하시더라고. 이번 주말에 성업이 같이 도와드림 어때? 혹시 아나 블로거 레진님이라고?”
성업님도 나와 같이 레진님의 얼굴을 보겠다는 심산이었는지 의외로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나에게는 참 다행인 결말이었지만, 성업님은 아마 이 때의 결정이 스스로의 인생을 바꾸리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 같다. 그렇게 주말을 함께 보낸 한 대표님과 성업님은 의기투합했고, 성업님은 레진엔터테인먼트의 사업 총괄 이사가 되어 눈부신 활약을 했다. 레진은 웹툰 유료화를 제대로 시작한 최초의 스타트업이 되었고, 카카오 같은 거대 플랫폼이 벤치마킹하는 최고의 유료 웹툰 회사로 초고속 성장을 했다. 모두, 내가 그 때 성업님을 잘 꼬셔서(!) 레진에 합류시켜드린 덕이라 생각하고 항상 으쓱한 기분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하던가. 계속 승승장구하던 레진에 어느새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왔다. 작가들과 공존해야 하는 사업의 특성을 가진 회사에 작가들과 대립하고 갈등하는 경우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경영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함께 극복해나갈 방법을 찾았지만,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어려움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했고, 당시 레진엔터테인먼트 이사회의 일원이었던 나는 다른 이사들과 주주들을 설득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성업님이 대표로서 적임자라고.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을텐데, 그렇게 레진엔터테인먼트의 2대 CEO가 된 성업님은 역시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재능과 노력으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상장사와의 합병을 통해 exit을 만들어 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곁에서 지켜봐 왔기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멋진 일을 해 냈는지 만감이 교차했다.
“정말 고생 많았어.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꺼야? 좀 쉴꺼야?” “아뇨, 저 레진에서 아직 못 다한 일들이 있어요. 이번에는 제가 창업자로 새 회사를 만들어서 그걸 해 볼꺼에요.”
그렇다면 이번에도 내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나 혼자가 아닌, 그 동안 성장한 퓨처플레이의 마피아들이 함께 한다면 더욱 더.
이번에도 성업님은 내 제안을 묵묵히 받아들여 주었고, 그렇게 퓨처플레이의 사내창업가(Entrepreneur-in-Residence; EIR)가 되었다. 새로 이사한 서울숲 오피스의 성수동쪽 창가에는 항상 큰 덩치의 그가 앉아서 열심히 사업계획서를 쓰고 있었고, 많은 퓨처플레이어들이 그와 교감하며 멋진 사업계획을 만드는 데 각자의 역할을 했다.
“회사 이름은 노틸러스로 하려구요. 아시죠? 바다를 누비는 잠수함.” |